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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 시선] '반이명박 전선' 앞에서 주눅들지 않기
[3호] 반차별, 작성일 : 09-10-12 14:04 / 조회 : 3,321
 webzine_3_4.txt (5.7K) [27] DATE : 2009-10-12 19:54:20


 
 [별+별 시선]  

 '반이명박 전선' 앞에서 주눅들지 않기 

                                                           
                                                                                                                       박석진 (인권운동사랑방)


‘전선’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다. 지난해 촛불집회 이후 ‘반이명박(반MB)’은 가장 커다란 정치 이슈가 되었다. 광우병 쇠고기 수입과 촛불 탄압의 주요 정치세력으로 이명박 대통령이 지목되면서, ‘이명박 정부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은 일단 모이자’는 주장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이명박 정부에 반대하지? 그럼 함께 해”라는 이 명쾌함.(이런 명쾌함은 ‘반자본 전선’이나 ‘반미 전선’도 비슷한 듯) 하지만 이 명쾌함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은 건 왜일까.

반이명박 전선 안에는 실제로 많은 차이들이 보인다. 커다란 전선 안에 다양한 차이들이 공존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들을 과연 긍정적인 ‘차이’로 드러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 망설임. 거대한 정치담론 속에서 차이와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차이를 드러내는 방식이 아니라 차이를 숨기는 방식으로 단결해 이명박 정부가 물러나기라도 한다면 우리 모두 함께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을까. 반민주적인 이명박 정부에 대항해 민주주의전선으로 단결해 싸워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같은 ‘민주주의’의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민주화를 위해 국가폭력에 대항해 싸웠는데 어느 순간 옆에서 함께 싸우던 남성이 가부장적 폭력의 가해자가 되어 있었다는 웃지 못 할 상황은 이제 그리 낯설지도 않다. 거대한 전선들 너머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여전히 모호하고, 계속 이야기하며 서로 확인하지 않으면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의 지향도 목표도 확인할 수 없다. 자, 다시 질문하자. 당신의 해방과 나의 해방은 만날 수 있나.

‘그걸 꼭 말로 확인해야 하냐’고, ‘동지를 못 믿겠냐’고 하는 말, 믿지 않는다. 그런 질문을 하는 의도는 더욱. 이건 ‘동지’의 문제도 ‘믿고 안 믿고’의 문제도 아니다. 연대에 있어 신뢰는 “믿는다”는 말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와 실천적인 행동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함께 하고 있다는 신뢰가 있다면 전선이 한 개이든 백 개이든 무슨 상관일까. 필요성이 공감되는 시기엔 힘을 모을 단체들은 알아서 다 모인다. 오히려 ‘단일한 전선’에 모여 있더라도 다양한 꿈들이 함께 차올라 넘실대며 수많은 다양한 전선들을 풍부하게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 모두를 위한 ‘보편적 해방’에 더 가깝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운동 의제들이 공존하면서 발전하고 또 서로 만나고 교차하면서 더 넓은 운동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작더라도 의미 있는 운동의 새로운 시도들은 더욱 권장되고 확산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회운동은 얼마나 넓어지고 깊어지고 있나. 소위 ‘민주화’되었다는 지난 정권 동안은, 그나마 거대한 전선이 잘 그어지지 않은 탓인지, 다양한 운동의 시도들이 있었던 것 같다. ‘정치’와 ‘국회’와 ‘무슨무슨 법’과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우리 삶 구석구석의 모순을 깊숙한 곳에서 지탱해왔던 수많은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바꿔내려는 운동의 시도들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런 운동들도 더 다양해지고 성장하는 것이 눈에 띄기도 했다. 그 운동은 ‘인권운동’의 이름이기도 했고 ‘여성운동’의 이름이기도 했으며 ‘성소수자운동’, ‘장애운동’, ‘평화운동’, ‘국제연대운동’ 등의 이름이기도 했다.

그런데 전선이 강화되었다는 요즘, 그 운동들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좀 과장일지도 모르겠지만, 현 정부와 정치권이 워낙 황당하고 어이없는 대형 이슈들을 정신없이 빵빵 터뜨리면서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이슈로 여겨지는 운동 의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의제는 제기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실제로는 작은 이슈도 아니지만. 경제위기로 인해 대형 공장에서 대규모로 정리해고가 단행될 것이라는 뉴스에는 많은 언론과 운동이 집중하지만, 비슷한 이유로 인한 여성노동자들의 정리해고에는 상대적으로 조용하다. 규모와 정도의 차이가 있지 않냐고? 여성노동자들은 이미 정리해고도 될 수 없는 비정규직이거나 애초에 대형 공장의 산업구조를 갖고 있지도 않다. 원천적으로 집중적인 주목을 받기 힘든 구조이다. 뿐만 아니라 직장내 성희롱/성폭력 문제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직장을 그만 두고 있는 여성들의 문제는 또 어떨까. 이명박 정부 이후 “나는 이명박 대통령이 싫어요”라고 제대로 말도 못하게 만드는 표현의 자유 침해도 심각하지만, 그 훨씬 이전부터 “나는 동성애자/트랜스젠더예요”라거나 “나는 HIV/AIDS 감염인이예요”라고 말하지 못해 왔던 현실은 이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덜 심각하기 때문에 지금도 주목받지 못하는 것일까. 경찰 폭력이나 고문, 감시와 같은 국가폭력이 점점 심해지고 있는 것도 현실이지만, 왜 여성과 아동에 대한 가정폭력이나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일까. 더 시급한 현안이 있어서? 하지만 지금까지 덜 심각하고 덜 중요한 것으로 여겨져온 것들은 항상 그래 왔다.

무언가를 더 중요한 것으로 만들어온 것은,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여러 현안들 중에서 결국 주류(적 가치)의 판단에 의해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류의 힘은 강력해서 심지어 비주류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조차도 스스로의 이야기를 부차적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기도 하고 주류의 힘 앞에서 주눅 들게 만들기도 한다. 주류의 힘이 강력할수록 이러한 경향은 더 강해진다. 하지만 “나는 이명박 대통령이 싫어요”라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왔을 때 “나는 동성애자/트랜스젠더예요”라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을까? 과거 국가폭력이 덜 심했다고 여겨졌을 때 소수자에 대한 폭력도 과연 덜 했을까? 누가 어떤 입장에서 정치 전선륄할 수 왔나? 그것은 누구의 정치 전선이었나?

‘이명박 정부’로 대표되는 신권위주의 독재권력에 반대하는 것도 중요하고, 반민주에 맞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켜내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 안의 민주주의의 내용은 이미 훨씬 더 다양해지고 풍부해졌다. ‘정치 담론’ 중심의 추상적인 ‘민주주의’로의 ‘대동단결’을 외칠 것이 아니라 비주류의 정치 담론이 주변화되지 않는 다양한 민주주의 전선을 만들어내는 것은 당위성의 문제를 넘어 현실적인 조건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차이들을 인정하면서 ‘우리’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은 단결을 해치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연대를 훨씬 더 튼튼하고 두텁게 하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이 주눅 들지 않도록 하는 것은 말하는 사람의 몫만이 아니다. ‘당당해져야 한다’는 당위성의 강요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주눅’에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공동체가 공동으로 책임져야 할 몫이다. 진보운동 내부의 주류적 가치를 성찰하면서 상대화하고 비주류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고민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과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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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m 09-10-13 11:22  
보편적 해방이란... 참 고민이 많네요 ^^
09-10-16 11:15  
주눅드는 사람에게 당당해지라,고 당위로 강요하는 것 참  많죠...
글 잘 읽었어요^^
공현 09-10-16 13:24  
전선륄할 ''';;

정치적 이슈나 입장에서 나타나는 '전선'의 한계도 있는 것 같고 (반이명박 전선은 초중 일제고사는 반대하지만 전국 고3-재수생 일제고사인 수능이나 대학서열화 자체엔 반대할 수 없지요 @_@)
그 '전선'으로 묶인 사람들 안에서의 미시적인 실천들에서 느끼게 되는 짜증도 있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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