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차별공동행동

▲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이 유례없이 언론에 대서특필 되면서 지도부 총사퇴 등의 '역사적인 결단'을 낳았다. 사진은 지난 9일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지도부 총사퇴를 논의하기 위해 중앙집행위원회를 준비하는 모습. ⓒ 남소연 민주노총

성폭력 상담 현장에서 일하는 나는 참 아이러니하게도, 전 국민과 전 언론의 분노를 사는 성폭력 사건이 생기면 왜인지 마음이 탐탁지 않다. 언론지상을 메운 성폭력 사건과 일상이 매우 괴리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성폭력은 많은 사람이 분노하고 공감하는 문제이면서, 동시에 가장 많은 통념에 둘러싸인 것이기도 하다. 뉴스에 등장한 사건을 보면서는 개탄하지만 자신은 크게 다를 바 없는 행동을 일삼는 사람들이 참 많다.

전체 성폭력 상담 건수 중 70~80%는 아는 사람에 의한 피해다. 직장의 상사·동료·학교 선배 등…. 아동·청소년 대상 성폭력도 가장 높은 비율은 친부·오빠·친족 등 가족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뉴스가 잘 되지 않는다. 언론지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사건은 연쇄 성폭력 살인이고 언론은 가해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기사로 쏟아내기에 바쁘다.    

성폭력에 위계를 두는 것도 여전히 팽배하다. 벙어리 냉가슴을 앓게 하는 직장 내 성희롱 문제는 언제 이러한 관심과 지지를 받아볼 수 있을까. '성추행'보다 '강간미수'여야 더 공감 받는 것을 보아온 피해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저항을 더 하지 그랬냐"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결과적으로는 더 심한 피해를 입어야 지지받을 수 있는 이중잣대 속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2차 가해' 문제가 중요하게 부각된 이번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을 보면서도 언론의 이중성을 느낀다. 지난 1월에 있었던 아내 강간 유죄판결을 두고 "아내 강간이 인정되면 가정이 파탄 나지 않겠느냐"는 논쟁을 계속 유발했던 언론들도 2차 가해로 고발할 수 있을까. 다를 바 없는 '조직' 보위론이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팽배해있는 성폭력을 범죄로 인식하기 위해 필요한 '성폭력 친고죄' 폐지는 불가하다는 입장이면서, 극악한 가해자를 잡기 위해 유전자정보은행은 꼭 추진하겠다는 당국. 성폭력 특별법상 보장되어 있는 고소기한이 1년임에도 '왜 이렇게 늦게 고소한 저의가 뭐냐'고 의심하는 인권의식으로 유전자정보은행을 잘 운용할지 궁금하다.       

민주노총 성폭력, 수면 아래에 주목해야 한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이 유례없이 언론에 대서특필 되면서 지도부 총사퇴 등의 '역사적인 결단'을 낳았다. 사건처리 과정에서의 심각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는 다른 조직으로 거듭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자. 이번 사건이 어떻게 이런 대대적인 과정을 밟게 되었는가. 어떻게 민주노총이 공식 문건을 통해 피해자에게 사죄하며 위로와 반성을 표명하고, 성폭력 문제에 대한 의지와 노력을 중대한 과제로 약속하게 되었을까.

핵심 간부에 의한 사건이기 때문에? 그런 사건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2차 가해 문제가 심각했으므로? 조직보위론에 입각한 축소 시도나 사건의 무분별한 유출, 소문내기 등이 하루 이틀의 문제였나. 

나는 이번 사건에 대한 민주노총의 '책임있는' 처리나 입장에 주목하기보다 왜 이제까지는 이렇게 하지 않아왔는지가 더 궁금하다. 그동안 묻혀왔던, 제대로 처리되거나 적어도 귀 기울여지지 않았던 사건들, 습관처럼 자행되어 온 조직보위론과 그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함께 사죄한 것인가?

진보진영 내 성폭력 사건은 진보언론에 제보해도 잘 다뤄지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조중동이 대서특필하지 않으면 잘 드러나지 않는다. 피해자들이 이런 상황을 배워야 하는 것인지 고민되는 부분이다. 개인의 목소리로는 되지 않고, 조직 내 사건처리절차도 기댈 수 없고, 결국 그들의 '권력게임'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가. 이렇게 언론의 무차별적인 그것도 비열한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보수 언론사의 관심에 의존해서만 피해자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인가.

민주노총은 누구의 눈치를 보는 것인지, 누가 움직여야 입장과 태도를 달리하게 되는 것인지, 마음이 몹시 씁쓸했다. 공식 사과와 총사퇴를 보면서도 마음이 위로받고 편안해지지 않은 이유도 그러했다. 수면 아래 지난 역사에 묻힌 사건들. 상처받았던 피해자들, 조직을 떠나게 된 사람들은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민주노총, 노력은 지난해야 한다

떠들썩한 주목을 받은 사건과 일상의 괴리에 우려하는 사람으로서, 민주노총이 앞으로의 대책과 계획의 실행에서 기계적인 태도에 빠지지 않았으면 한다. 지난 9일 발표했던 기자회견문에서 '2차 가해자가 누구인지 제보해달라는 주문'이 내가 생각하는 대표적인 기계적 이해와 태도다. 2차 가해의 문제가 특정 누군가에게만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성폭력 문제가 성폭력만으로 고립되어 독립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을까 싶다. 성폭력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문화는 성폭력뿐 아니라 일상적인 차별·배제·소외·성별분업에도 허용적이다. 또, 성별 권력이 자연스럽게 존재한다면, 성별 차이뿐 아니라 나이·학력·고용형태 등의 차이도 차별되는 문화가 배어 있을 것이다.

성폭력은 그 전과 후에 있는 많은 일상 속 차별과 억압을 드러내고 있는 지표다. 이런 문화가 송두리째 바뀌는 미시적인 변화가 있지 않고서는 아무도 성폭력 사건의 재발방지를 약속할 수 없다.

간부대상 성폭력예방 교육이 '대안'이 될 수 있으려면, 이제까지는 어땠는지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2002년에 이미 제정된 '성폭력·폭언·폭행금지 및 처벌 규정'에는 성폭력 예방 의무 교육이 명시되어 있고, 피해자 보호 및 비밀유지 조항, 엄격한 2차 가해의 방지, 가해자 처벌 조항도 이미 있다.

이제까지 교육은 어떻게 되어온 건지, 사건처리는 어떻게 되어 온 건지 무척 궁금하다. 스스로도 답답할 것 같다. 규정이 생긴 지 수년이 지나도록 사건처리의 감수성이 이렇게 일천할 수 있었을까 말이다.

권위적인 조직 체계, 상층부와 기층으로 위계화된 체계도 주범으로 보인다. 위계화된 조직에서 지도부는 권력화될 수밖에 없다. 사람이 바뀐다 한들 구조 자체가 바뀌지 않으면 문제는 또 발생하지 않을까. 2월에 급히 하겠다고 발표한 지도부 대상 교육에서 '우리가 앞장서서' '우리가 책임지고' 성폭력 해결의 의지를 드높이는 모습은 없었으면 한다. 차라리 겸허하게 각각의 특권의식을 성찰해야하지 않을까. 

'성폭력'을 말이 필요없는 천인공노할 비도덕적 일이라 간주하고 가해자만 격리하는 방식은 간편하지만, 그 속에 자리 잡은 일상의 문화를 면면히 성찰하고 재구성하는 일은 지난하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성폭력은 이 과정을 통해서만 줄어들고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말하고 싶다.

언론의 풍파가 지나고 난 뒤, 민주노총의 '일상'이,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을 지켜본 모든 이들의 일상이 변화되기를 바란다. 일상 속 지난한 싸움이 이제부터 펼쳐질 것이다.